시킨 것도 못해
2024-02-02 12:41 ・ 글임자

"오징어 생물이 있는데 이거 사면 돼?"

아니나 다를까 심부름꾼은 한 치도 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내가 손질된 거 사라고 몇 번을 얘기해?"

설마 '손질된 거'라는 그 말 뜻을 모르는 걸까?

출발 전에도 얘기하고, 문자로도 분명히 강조했는데 왜 엉뚱한 소리만 하는 걸까?


요즘, 아니 언제나 그렇듯 딱히 갈 곳 없고 오라는 데 없는 그 양반은 매일같이 칼퇴근하신다.

오늘이 금요일이란 사실에 어제부터 기분 좋아진 그 양반은 또 뭔가 마시고 싶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지독한 감기로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며(병원에서도 가급적 외출을 삼가라고 했고 몸이 힘들어 나갈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시장을 보지 않아 반찬이 부실했다. 반찬이 부실한 것은 둘째치고 그 양반에게는 마실 무언가가 부실했으므로 또 급히 마트로 향하게 된 것이다.

"나 마트 갈 건데 필요한 거 있어? 내가 사 올게."

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출근 복장 그대로 다시 나가려고 했다.

사실 오후에 오래간만에 시장을 봐 오긴 했다.

물론 별 건 없었다.

대신 시장을 봐주겠다는 선심에서 한 말이겠지만 나는 그다지 필요한 게 없었고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다.

안 사실, 안 가야 그만이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그 양반은 믿을 사람이 못된다.

아마 막걸리 때문에 나가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별로 필요한 건 없는데."

"그러면 이따가 연락 줘."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그 양반은 집을 나섰다.

불길했다.

아마 싹 쓸어오고도 남을 것이다, 내키는 대로.

이럴 때는 일일이 지시를 해야만 한다.

제발 내가 말한 것만, 그대로만 사 오라고.


"주꾸미가 있네. 살까?"

"해 먹을 줄 알아?"

"아니?"

"난 그거 할 기운 없어. 직접 해 먹을 거 아니면 잘 판단해."

"알았어. 안 사야겠다."

"새우도 있네. 살까?"

"뭐 하게?"

"아니다, 그냥 두자."

"생선 많이 나왔다. 병어 세일하네."

"세일은 항상 해."

"조기도 있는데?"

"조기는 집에도 있어."

"방어가 왜 이렇게 싸지?"

"싸든가 말든가 무슨 상관이야?"

"알았어, 안 살게."

"치킨 세일하네. 살까?"

"애들 감기도 다 안 나았는데 기름기 많은 음식 별로 안 좋아. 나중에 나으면 줘, 주더라도. 내일 내가 닭 사서 닭볶음탕 할 거야."

"딸기가 왜 이렇게 비싸지?"

"쳐다보지도 마."

"콩나물 살까?"

"내가 진작 사놨어."

"뭐 필요한 거 있어?"

"합격이가 국수 먹고 싶다니까 거기 넣게 호박이나 사든지."

"애호박이지?"

"그럼 애호박이지 늙은 호박일까?"

"호박 어딨지?"

"채소 코너 쪽에 가 봐."

"하나에 2900원이네."

"정신 차려! 두 개를 사야 하나에 2900원이야. 하나에 그 가격  아니야."

"진짜 그러네. 하나엔 3500원이네."

"정신 좀 차리고 잘 보고 사. 어이구, 시원찮아서 정말..."

"오징어가 있긴 있는데 생물인데?"

"그거 말고 내가 손질된 걸로 사라고 했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 엉뚱한 거 사 오지 말고. 5 마리에 15,000원인데 지금 만원에 파는 거 있어. 그걸로 사."

"진짜네, 당신 그런 거 다 어떻게 알았어?"

"딴 소리 말고 똑바로 사 오기나 해."


일일이 하나씩 짚어주고 알려 줘야만 하는 마흔한 살 어른이,

어쩔 땐 다 알려 줘도 엉뚱한 일을 벌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어른이,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 불안하고 미덥지 않은 어른이,

심부름 하나를 시키고 조마조마해하며 걱정하게 만드는 용한 재주가 다 있는 어른이,

오겠다고 말한 지가 30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인 어른이,

마트 안에서 세상 가장 밝은 표정이 나오는 어른이,

결정적으로 딸이 꿀떡을 사달라고 했으나

꿀호떡을 사 오는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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