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농정담] 한동훈이 평가하고 판단할 문제는 도대체 무엇일까?
2024-02-02 14:19 ・ QR News





한동훈이 요사이 정치 행보를 이어가면서 이런저런 질문에 응답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김건희 리스크’ 관련 질문만 나오면 예의 로봇처럼 동일한 답이 나온다. 곧 ‘제가 평가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이 거의 기계적으로 나온다. 왜 조선 제일의 혀라는 자가 이렇게 몸만이 아니라 말도 사리는 버릇이 들었을까? ‘사천시장 약속 대련’의 충격이 어지간히 큰 모양이기는 하다. 그 이전에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에 대해 나오는 대로 혀를 놀리더니 김여사의 김 자만 나와도 자동응답기 수준의 말만 나오니 말이다. 그럼 과연 한동훈이 평가하고 판단할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현재 한동훈은 보수 진영을 대표한다는 국민의힘에서 총선 공천권이라는 절대 권력을 위임받고 소황제로 군림하는 중이다. 그래서 그가 국민의힘 의원들을 상대로 무슨 언행을 시전 하든지 간에 110명이나 되는 의원이 간신 놀이를 하거나 꿀 먹은 벙어리 놀이만을 시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절대 권력을 위임받은 황태자가 김여사만 나오면 작아진다. 문제는 그 김건희 리스크가 단순히 총선에서 국민의힘을 무너뜨릴 아킬레스건일 뿐 아니라 보수 진영 전체를 붕괴시킬 핵폭탄이라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로 머리가 좋은 한동훈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도 이 모양이다. 물론 누구나 대충 감은 잡을 수 있다. 현재 살아 있는 최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최고 존엄의 지위에 있는 김여사를, 다름 아닌 최측근 한동훈이 감히 건드리려다가 죽다가 살아난 다음이니 그저 몸조심 말조심해야 하는 딱한 사정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호기롭게 출발한 한동훈 호가 이 정도로 순식간에 깨갱거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국회에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난도질하던 그의 조선 제일의 혀가 이리 순식간에 무뎌진 것에 더해 판단력도 흐려질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한동훈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갑작스러운 모르쇠 시전이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일이라는 뻔히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그도 권력이 좋은 것이다. 권력자의 주변에서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 어슬렁거려야 기회가 되면 주군이라고 물어뜯고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준석, 김기현이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서 벌판에서 고생 중인 모습을 보고도 감히 최고 존엄에 덤비는 헛짓을 뭐 하려 하겠는가? 더구나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대패하고 윤석열 정권이 붕괴한다면 무너진 보수가 폐허에서 살아날 카드는 한동훈 자신 밖에 누가 있겠나? 그런 자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윤 대통령 부부에게는 모질게 대하는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이 한동훈을 더욱 살갑게 대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언론이 한비어천가를 부르고 싶어도 한동훈 자신이 말을 마구 던지는 상황에서는 대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벌써 한동훈 어록이 돌아다닐 정도가 되었다. 먼저 안철수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제가 아바타라면서요? 당무 개입이 아니지 않나요?” 결국 스스로 윤 대통령의 아바타라는 잠재의식 속에 담긴 열등감을 이렇게 드러내고 말았다. 민주당 원내대표 홍익표가 이를 두고 아바타가 사실이면 당무 개입으로 해석된다고 일갈했는데 맞는 말 아닌가? 여기에 더해 한동훈이 국회의원 세비를 삭감하자는 주장에 대해 대통령과 장관이 솔선수범하라고 맞받아치자, 예의 한동훈 표 ‘조선 제일의 혀’를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건 그냥 '싫으면 시집가' 이런 얘기 같은데요? 그냥 논리적으로 앞뒤 맞는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음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 말 자체가 비논리적인데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감이 안 잡힌다. 게다가 요즘 시대에 ‘시집가’라는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언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한동훈에게서 50살에 어울리지 않는 애늙은이, 아니 꼰대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한동훈의 말투가 그가 싫어하는 여의도 어법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서초동 어법’이란 말인가? 사실 한동훈은 국회에서 의원들과 말로 치고받을 때도 이 모양이었다. 본인은 자신만만하게 받아친다고 생각하고 말했지만 결국 법정에서 피고 측 변호사와 말싸움하는 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곧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내가 책잡힐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버티는 검찰 어법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대로 아무 말이나 동원해 일단 무조건 상대방을 공격하고 불리할 때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판단 중지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나의 의중을 들키지 않아서 재판 과정에서 유리한 점을 강조하고 불리한 점을 가리는 그 유명한 ‘서초동 어법’을 시전 하는 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동훈 어법에 재빨리 적응한 것이 바로 한동훈이 영입한 이수정이다. 처음에는 한동훈이 삐딱선을 타며 독립선언을 한다고 여긴 이수정이 김여사 사과 운운하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급변하자 바로 식언, 곧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다시 삼켜버리는 신공을 보이더니 이제는 갑자기 그루밍·공작 운운하면서 느닷없이 대통령 유감 표명을 요구하며 나섰다. 도대체 한동훈 사단의 현란한 말 바꾸기 신공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이 안 될 정도다. 핵심은 ‘김여사 리스크’ 목록에 나와 있는 여러 사건의 위법 여부를 상식적이고 공정하게 따져보는 것인데 한동훈과 그의 사단이라고 모인 ‘인재’들은 말 바꾸기 신공을 동원하여 국민의 판단 중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 중지는 현대 철학의 대표자인 후설이 창시한 현상학이라는 학문에서 차용한 에포케(ἐποχή)라고 부르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억지로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말고 일단 괄호를 치고 잠시 그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자는 말이다. 이러한 판단 중지를 하는 이유는 정확한 진리를 아는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판단 중지는 후설이 만들어 낸 개념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피론이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제자인 에네시데무스는 판단 중지를 하는 이유 10가지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표상을 드러낸다.

2) 인간 사이에서도 비슷한 차이가 나타난다.

3) 같은 사람이라도 감각에 주어진 자료는 자기모순적이다.

4) 감지된 자료는 물리적인 변화에 따라 때때로 변한다.

5) 감지된 자료는 지역 상황에 따라 변한다.

6) 대상은 공기나 습기와 같은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려진다.

7) 대상은 색상, 온도, 크기, 운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건에 놓인다.

8) 모든 지각은 상대적이며 상호 작용을 한다.

9) 인상은 반복과 관습으로 인상은 덜 심화한다.

10) 인간은 다양한 법과 사회적 조건으로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 성장한다.    


사실 유럽 지성사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은 이러한 회의주의는 오늘날 재평가를 받고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는 물론 근세까지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인간 이성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발생한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붕괴하면서 상대주의, 회의주의, 비관주의, 허무주의와 같은 비이성적 사고방식이 오히려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인간은 결국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부조리한 존재라는 실존주의적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아예 인간 존엄에 대한 신뢰 자체가 거의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그저 여러 동물 가운데 하나일 뿐 여러 전통 종교나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이성과 지성을 갖춘 존엄한 존재가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라는 ‘타락한’ 자본주의가 득세하면서 피안의 세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다가 소멸하는 물질적 의미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허무주의가 판치는 세계에서는 올바른 원칙과 도덕률도 상대주의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법과 제도의 원칙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 그래서 모든 원리 원칙에 대해 판단 중지를 하는 관행이 정착된 세상에서,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나의 생존과 관련된 유불리만을 재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바로 그런 시대정신과 집단의식이 한동훈의 사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한동훈도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선택적 판단 중지를 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감정을 마구 ‘배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배설은 문자 그대로 일과성인 특징을 지닌 것이기에 다음 날이 되면 자신도 기억 못 한다. 물론 정확히 말하지만, 선택적 망각, 곧 스스로 기억하기 싫은 것은 기억하지 않는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에 젖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편의주의는 맹목적인 생존의 의지에서 나온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 없이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잘 먹고 잘살다 죽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 뿐이다. 그래서 내 생존에, 특히 잘난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에만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선택적 판단 중지를 시연하는 삶에 투신하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 엘리트의 산실인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소년 급제를 하고 검찰에서 한국 사회를 단죄하는 삶만을 살아오다가 정작 자신이 단죄당하고 문책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는 상황이 낯설기만 한 한동훈이 시전 하는 판단 중지, 특히 선택적 판단 중지는 modus vivendi, 곧 한동훈만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매우 부조리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만 하는 과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다가 한국 최고 엘리트마저 그런 시대정신에 갇혀버리면서, 이성과 지성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성의 피안에 놓인 ‘저렴한’ 선택적 판단 중지의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 슬퍼지기까지 한다. 출세와 권력 그리고 풍요로운 삶이 전부인 이른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리 소중한 가치일까? 밤만큼이나 어두운 이 사회에서 버텨야 하는 민초들의 밤잠이라도 편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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