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외줄을 내려오는 그대에게
2024-02-02 14:29 ・ 적적(笛寂)

우리는 불꽃놀이도 없이 한없이 밤을 기다립니다. 진격할 적진도 없이 급습할 도박판도 없이 게다가 이젠 술판도 모두 사라진 한가한 골목을 쏘다닙니다. 온종일 의자에 앉아 엉덩이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다 이젠 발목이 뻐근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기다리던 밤이 옵니다. 어둠이 부풀어 오르면 밤이 터진 뒤 가로등이 켜집니다. 창밖으로 보면 제법 먼 길이 코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합니다. 온종일 저는 네모난 바퀴처럼 집안을 굴러다녔습니다. 가끔 모란은 네모난 바퀴가 되어 버린 나를 밟고 지나가곤 합니다. 때론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밟고 다니며 바퀴가 돼버린 집사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자정을 넘는 마지막 열차가 밤의 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열차를 타려고 어깨를 밀어 넣으며 집으로 돌아갈 어둠에 탑승한다. 누군가는 닫힌 문밖으로 밀려나고 쏟아져 나오는 종착역 계단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으며 출구를 나온다. 오늘 밤도 무사히 밤으로 돌아왔다 아침의 환승역까지 나는 피곤한 눈꺼풀을 감고 있을 것이다

 

자꾸만 엔터를 눌러 대는 습관으로 화면은 텅 비어 있습니다. 습관은 공간을 만들고 활자는 부는 바람에 마구 휘날립니다. 견딜 수 없는 권태로운 행간은 서로의 뼈 마디가 기울 때마다 바닥에 닿았다가 이내 솟구쳐오릅니다.

 

겨울 코트를 입고 낮에 나가보니 봄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자꾸만 거울 속의 나를 비춰보고 걷다가 엄마 전화를 받습니다.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라고 목도리는 하고 나갔는지 물어보십니다. 사람들이 봄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니 미친 거라며 아들은 정신 차리라고 한 뒤 얼른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엄마는 봄이 없는 계절을 몇 해나 보내고 계신 걸까요

 

공원을 돌아다니며 피어난 꽃이 있는지 기웃거립니다.

 

너무 이른 계절의 밤을 다시 돌아다닙니다.

 

나는 그런 계절을 우울의 경계 라고 이름 붙입니다.

 

재일교포 정의신나에게 불의 전차를 보았던 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배우 차승원의 첫 연극 무대 기억되는 연극이었죠. 한국 문화와 민속 백자를 사랑하는 교사 역에는 초난강으로 알려진 쿠사나기 츠요시가 상대 배우로 나오는 한일 합작 연극이었어요

 

외줄 타는 남사당패의 꼭두쇠 역을 맡은 차승원의 인터뷰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보러 간 연극이었는데 먼저 외줄타기를 능수능란하게 타야 했던 배우의 노력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는 공연이었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의 그로서는 외줄을 타는 일은 힘겨웠겠지만 보는 내내 장신의 그가 외줄을 타는 걸 보는 것 또한 아슬아슬한 장면이기도 했다.그는 인터뷰 도중 매일 밤 줄을 타는 꿈을 꾸고 매일 밤 줄에서 고꾸라졌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줄을 타러 공연장을 찾았고 외줄에 오를 때마다 공포로 질려버렸다. 수없이 떨어지고 고꾸라졌다 이젠 한계에 다다라 그냥 어딘가로 매일 도망치고 싶었다고.

 

그리고 떨어지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게 돼버렸다고 한다. 찢어지면 꿰매고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르면 그만 이었다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떨어지고 다시 줄에 올라서서 이쪽에서 저쪽 편을 오가며 이 연극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다시는 외줄을 타지 않을 거라고 맹세하며. 다시는 외줄을 타지 않을 거라고.

 

서늘한 이 겨울의 경계를 허공에 걸어 외줄을 타고 있었다 떨어지거나 고꾸라지지 않아도 나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외줄을 탈 것이다. 매번 떨어지거나 고꾸라져도 꿰매고 약을 바르며 겨울을 견딜 것이다. 찾아올 봄이 끝나도 다시는 봄을 맞이하지 않을 것처럼

 

아니 다시는 봄을 맞이하지 않을 사람처럼 힘차게 경계를 딛고

 

허공으로 솟아 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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