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 설명서
2024-02-14 00:04 ・ 적적(笛寂)

며칠 전까지 산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건너편 사거리로 자동차들이 다니고 어느덧 가로등이 일시에 꺼져 버립니다. 밤이 끝나고 장막이 내려져 일순간 어두워진 것도 같습니다.

  

이어 달리기에서 먼저 레이스 위를 천천히 달리던 아침이 바통을 이어받자마자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도 팔을 힘차게 내젓는 것도 권태스러워진 계주 선수처럼 뛰는 것이 느립니다. 멈추어 서버립니다. 마치 나는 왜 달리려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것처럼.

  

이제 여섯 번째 봄을 맞이하는 모란은 아침부터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냉장고 문 앞에서 나 뒹굴고 있습니다. 냉장고 문이 열린다고 해도 딱히 그 안의 음식들에도 관심이 없고 환히 켜진 불에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스르르 문이 닫힐 때 깜짝 놀라 몸을 팔-짝 뛰어오르는 것 외엔 냉장고 문을 여는 일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책을 보다 책장 끝을 동그랗게 말아 쥐는 쓸데없는 습관을 지닌 나처럼 그런 습관인지도 모릅니다. 다 읽고 난 책은 특히 읽히지 않던 페이지는 종이의 나이테처럼 접혀있습니다. 

  

나는 가끔 저렇게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란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닫혀진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음식들 틈에 끼어 불이 꺼진 곳의 공포와 마주칠 때쯤 문을 열어주리라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란은 그 이후에도 냉장고 문을 열어 젖힐 것이 분명하므로 그리고 문이 닫히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저 모란의 이름을 부릅니다. 냉장고 문 앞에 붙인 테이프를 더 굳게 붙입니다.

  

흐린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은 다소 무거워 보이고 짙은 회색빛까지 돌고 있습니다. 2월 중순의 날씨 답게 바람에서 이제 막 히터를 켠 자동차 실내처럼 따스함이 몰아칠 것도 같습니다.

아직 봄을 말하기는 이르지만, 알다시피 우리에겐 꽃샘 추위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낮에 다소 덥더라도 겨울 코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3월의 한파와 4월의 폭설을 겪어낸 우리는 일찍 맞이한 봄의 피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제…. 음 이제 더 회색빛으로 변해갑니다. 마치 물기가 찰랑이는 시멘트 바닥처럼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시멘트가 굳으면 그 끝을 조금씩 떼어내 하늘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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